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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를 선택한 청춘의 이야기


배수현


아침 7시, 친구들과 함께 흐로닝헨으로 여행가는 버스 안. 2시간 내내 풍경은 온통 녹색 들판에 흩어져 있는 소, 말, 그리고 양뿐이었다. 가끔가다 보이는 풍차들, 지점에 널브러 있는 양들, 이런 서양판 전원일기 같은 풍경을 보며 문뜩 각했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네덜란드에 오게 걸까.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네덜란드라는 나라에 무지했 다. 그저 서양의 어느 선진국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만 내가 존경 하는 선생님이 네덜란드인이셨고, 그분의 수업을 들으면서 아, 네덜란드인들은 키가 크고 영어를 하며 시니컬하구나,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네덜란드 대학설명회가 열려 호기심에 참가했었다. 네덜란드 대학의 저렴한 학비, 높은 수준의 교육에 놀랐고, 총리도 자전거를 타는 검소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관심이 생긴 것은 니었다. 고3이 나의 관심은 크게 갈래로 나뉘어졌다. 바로 정치와 음악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산업에 관심이 컸던 나는 줄곧 방송국 혹은 엔터테인먼트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었다. 그러 2016년 하반기, 최순실 게이트로 촛불혁명이 불었고, 정치에 일말의 관심도 없던 내가 매일 뉴스를 챙겨 듣기 시작했다. 탄핵 선고가 되는 순간에는 모든 친구들이 환호하였고, 나도 르게 마음속에서 열정이 피어 올랐다. 이렇듯, 당시 나는 치와 음악이라는 섞이지 않을 같은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 고, 때문에 지원할 학과를 선택할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Communication Science과를 알게 되었다. 학과는 정치와 엔터테인먼트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한 4가지 모듈 Communication, 그리고 Entertainment Communication 이다.)로 구성되어있어 내겐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안 줄곧 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미국대학교의 비싼 비와 위험한 환경 (총기소지 국가)에 겁을 먹고 있었던 나로서는 네덜란드의 저렴한 학비와 비교적 안전한 환경(암스테르담은EIU발표세계에서가장안전한도시4) 혹하지 않을 없었다.

물론 학과의 높은 세계 랭킹도 결정에 하였다.(암스테르담대학교의CommunicationScience학과는Communication&Media분야에서QSRanking세계1) 모든 조건들이 어우러져 결국 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합격이 발표된 후, 한동안 대학을 잊고 살았다. 2월에등학교를 졸업하고, 8월에 네덜란드로 향하기까지 6개월의 갭이 동안 알바와 과외, 그리고 친구들과의 추억 쌓기에 몰두하였 다. 그저 학교에서 제출하라는 서류가 있으면 제출했고, 외의 유학생활 준비에 신경을 쏟지 않았다. 훗날 이것이 어떤 어려움 불러일으킬지 모르고 말이다.

사건은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첫날에 일어났다. 학생단체를 통해 중고자전거를 구매했는데, 오티 소집시간과 겹쳐 자전거를 직접 타볼 시간이 없었다. 나름 중학교 자전거 여행을 떠났던 적도 있었기에 그닥 걱정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오산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의 기럭지에 맞춰진 자전거는 160cm의 나에게 너무 컸고, 심지어 핸들브레이크가 아닌 풋브레이크는 새로운 난관 이었다. 간단한 설명회가 끝나고, 소규모 그룹으로 나뉘어져 암스테르담 시내 곳곳을 자전거로 누비고 다니기 시작할 때, 사건이 터졌다. 멘토를 쫓아 열심히 자전거를 타던 나는 울타리가 없는 운하 옆을 지나가고 있었고, 갑자기 들이닥치는 인파에 급히 방향을 꺾다가 그만 운하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수영을 못해 진짜 이대로 죽는 것인가 온갖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편에 보트들이 주차되어있어 강에 빠지는 대신 보트 모서리에 부딪혔고, 이마에 혹을 제외하면 별달리 다친 없이 구조될 있었다.

이처럼 네덜란드 도착 6일 만에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안정을 되찾았다. 심지어 자기소개시간마다 열심히 이 에피소드를 풀며 유쾌하게 사건을 넘겼다. 그러나 그로부터 뒤, 번째 사건이 터졌다.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는 길에 그만 트램 레일에 걸려 넘어지고 것이다. 앞니가 깨졌고, 무릎에 상처가 났다. 당시에는 오히려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 20분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문제는 후였다. 다음날 병원을 예약하려고 했으나 더치 의료시스템상 3주 후에 진료를 받을 있었고, 그마저도 의사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다못 마데카솔 같은 연고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하였다. 답답한 마음에 그럼 더치 사람들은 상처가 나면 무엇을 바르냐고 물었을 때, 그저 소독하고 가만히 놔둔다는 답이 돌아왔다.


처음으로 문화적 차이를 느끼게 뼈아픈 경험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더치 시스템 안에서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 걱정이 가족들은 치료를 받느냐고 화를 내고, 너무 원통하여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무릎의 상처는 그렇게 아물어 물집 같은 흉터로 남았고, 통증은 아직까지도 미약하게 남았다. 깨진 앞니 치료도 쉬운 것이 없었다. 치과에서 어찌어찌 필링을 붙여주었지만, 처음에는 더치보험이 아닌 국제보험 (AON)을 들었다는 이유로 비싼 치료비를 지불해야 했다. 이후 절차에 따라 AON에게 환급을 받았지만, 그것마저 5개월을 전화/이메일을 통해 독촉을 후에야 받을 있었다 (AON에서 환급 받기를 포기한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어찌 보면 나는 더치 삶에 적응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나는 독립적이고 끈질긴 사람이 되었다.


가령 주거보조금을 신청할 때에도 하나부 열까지 쉽게 되는 절차가 없었지만( 관리업체와 시청, 그리고 세무서 사이에 정보입력시스템 오류가 있어 이를 해결하고자 중간에서 엄청 많은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끈질긴 노력 끝에 6개월 만에 수령할 있었다.

쓰레기 수도 세금 면제 신청을 도, 페이지가 넘는 더치 우편을 번역해가면서, 며칠 동안 무서와 시청에 연락해가면서 인내심 있게 해나갔다. 모든 직원들 서로 자기 담당부서가 아니라며 나를 귀찮아하는 것을 느낄 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같지 않은 일들도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느끼니,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동아리 (신문, 밴드, 춤), 아르바이트 (레스토랑, 과외, 구원), 활동 (교환학생, 명예학사)을 하며 다채로운 경험을 쌓았 다. 소중한 인연도 많이 만났다. 홀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던 서러운 시절을 되돌아보며, 새로 오는 학과 후배들께 도움이 되고자 지속적으로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고, 다른 여타 인적 네트워크도 중시하게 되었다.

버스 밖에 펼쳐져 있는 들판을 보며, 나는 다시 생각한 다. 지난 2년간의 어려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듯 평온한 경에 감사하지 하고 살았을 것이다. 좌충우돌이 많은 독립 생활이었지만, 성장통 때문에 단단해진 나를 느낀다. 이제 나도 모르게 나라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졌고, 심플함에 편안함을 느낀다. 2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가끔 보이는 핑크빛 늘이 어여뻐 보이고, 조명이 비치는 운하에 감탄을 터뜨린다 면, 나름 네덜란드에 적응하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