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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어른아이의 성장기

김지원



"잠시 한국을 떠나있겠습니다."


막내딸의 폭탄선언에 부모님이 단숨에 고향에 상경하셨습니다. 워낙에 걱정이 많으셔서 딸이 홀로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도 전전긍긍하시는데 대륙을 건너 생전 생각지도 않은 화란에 가겠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을 겁니다. 저는 결국 울고 말았습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도서관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지구가 힘을 다해 제게만 중력을 거는 처럼 점점 무거워졌을 뿐입니다.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에 순간이 단거리 경주인 앞만 보고 달려가기만 하던 저는 꽃이 지듯 점점 숨이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교환학생이라도 떠나지 않으면 정말 숨이 막혀 같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부모님은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네덜란드행은 충동적이었습니다. 그해 가을, 운명처럼 만난 네덜란드에 교환학생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내면이 문드러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캠퍼스의 나무들이 빨강 노랑 꼬까옷을 입을 때쯤 우리 학교에서는 교환학생과 재학생이 팀을 이뤄 각국을 대표하는 부스를 설치해 문화를 알리 작은 지구촌 행사가 있습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저는 네덜란드 부스 장을 맡아 남짓한 더치 학생들과 재미난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주간 동고동락하면서 더치 친구들과 쌓은 우정과 간접적으로 네덜란드 문화는 민들레 홀씨 되어 마음에 심어졌습니다.


개성은 가십과 추문의 빌미가 되는 군대식의 기숙형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고사하고 타인의 청탁이나 제안 거절하지도 못하는 예스맨이 되었습니다. 타인의 색이 마구 덧입혀진 꿰뚫어 친구들은 제게 거절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쉽게 고개를 덕이기만 하면 되는 Let’s ~ 아니라 Do you want to? 라고 물어보며 진의를 연거푸 물어봐 주기도 했습니다. 3주간 지켜본 그네들은 정말 복해 보였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고,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확연했습니다. 무엇보다 빠른 물살에 맥없이 찢기는 낙엽 같았던 무기력했던 저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고 꾸밈없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인 그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네덜란드는 대체 어떤 나라 기에 다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알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몸에 배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저들은 사소한 것에도 깔깔거리며 웃을 있는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마음을 열고 대가를 바라지않는 관심을 가질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다친 발목이 구적으로 낫지 않을 거라는 진단을 받고 물리적 통증은 그것대로, 마음의 그것대로 앓고 있었습니다. 더치 친구들은 오래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귄 벗처럼 진심으로 저를 위로해주고 함께 걱정해주었습니다. 한국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함께 병원에 가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탓에,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진찰을 같이 받으러 가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날부터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라고는 튤립과 풍차 뿐인 나라를 가봐야겠다 생각을 했던 같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먼저 적응해야 했던 것은 수업 중에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수업 진행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입을 떼기조차 어렵고 말하기 전에 번은 넘게 머릿속으로 읊조려 보아야 했습니다. 이것도 적응되는지 종강할 때쯤엔, 여전히 볼이 붉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자발적으로 손을 들어 참여하는 저를 발견할 있었습니다.

저를 가장 뚜렷하게 변화시킨 것은 더치 사람들이 웃는 빈도였습니다. 날씨가 궂어도 웃고, 선로에 문제가 생겨 기차가 갑자기 역행하더라도 재미난 에피소드인 크게 웃었습니다. 이미 낡은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정말 모든 것은 관점의 차이라는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궂은 씨가 있어 맑은 날씨가 더욱 소중한 것이 되고, 기차가 역행하는 것은 하루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에피소드가 테니 말입니다. 또한, 웃음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다른 사람이 웃는 보면 저도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리 됩니다. 한국에서는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바빴지만, 그곳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함께 웃음을 공유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번은 오래간만에 싱그러운 햇살이 포근하게 저희를 감싸매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킨더르다이크로 향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섬에 있는 수상 버스 정류장을 찾았을 때, 표지판이 곳을 가리키고 있어 혼란스러웠습니다. 당혹감에 분쯤 거길 계속 맴돌고 있을 때였을까, 자전거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시던 노신사분께서 저희에게 다가왔습니다. 쉰듯한 목소 리로 어딜 가냐고 물어보셨습니다. 풍차를 있는 킨더르다이크라는 곳에 가려고 한다고 말씀드리니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전거를 싣고 섬으로 가는 도중 검표원이 저희에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노신 사분께서 저희 것까지 내셨으니 괜찮다며 좋은 하루 보내라고 방긋 웃어주셨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척 감사한 마음에 할아버지께 가니 해사하게 웃으시며 “my pleasure”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신 도리어 저희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네덜란드에는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저희가 손녀 같았는지 육지에 내려서 제게 손짓하더니 킨더르다이크까지 안내해 테니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앞장서시면서도 내심 걱정 되셨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새끼강아지들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함에 바를 르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렇게 와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착하고 나서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가라고 하셨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에서 만들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할아버지와 함께한 짧은 순간일 거라 수줍게 성함을 여쭤보고 생생하게 그날을 돌이켜 볼 있도록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말문이 트인 저희 데릭 할아버지께서 목소리를 잃은 사연을 들었습니다. 모진 병마와 싸우시느라 선명한 목소리와 대부분의 청력 잃게 되셨지만, 할아버지께선 누구보다 맑은 눈망울과 해맑은 웃음을 가지고 계셨고 무엇보다 당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을 어느 표정에서든 읽을 있었습니다. 그러시면

저희를 만난 할아버지의 하루에 일어난 특별한 일이라고,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어떤 강연보다 제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일상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일, 무한 경쟁에서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했었고, 존재하는 빼어난 사람들에 스스로 갉아먹은 자존감에 익숙해져 다른 사람이 배는 나룻배 척도 띄울 없는 좁고 얕은 물길을 가진 제게 가장 요원했던 것을 배운 날이었습니다. 6개월간 네덜란드 생활을 통해 무슨 일이 생기든 여유를 찾고 행복한 삶을 스스로 꾸릴 있는 자신감을 배웠습니다. 특히나 제가 한국에서 생활하면 가깝게 지내지 못한 것들이었던 웃음과 행복, 긍정적인 사고를 몸소 실천 해볼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너 많이 변했다”였 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아침에 일어나는 고역이었던 제가 (아마도 마음의 병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하루를 어떻게 낼지 생각하고 저만의 리듬을 갖춤으로써 훨씬 자율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웃음이 헤퍼졌습니다. 이제야 제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사고의 전환 행동의 전환으로 이어지고, 행복을 제가 주도하는 것, 네덜란드에서 얻은 가장 값진 수확입니다.